배나은 작가 | 2007/06/07 13:20

토익봤네 관악선녀
제국주의의 언어, 영어 : 완전히 거부하고 고립될 것인가 동화 후 예속될 것인가

얼마 전 문자 하나를 받았다. 모의 토익을 신청하라는 과 사무실의 공지였다. 토익 점수를 내라 해도 도무지 내질 않으니 모의 토익이라도 보고 점수를 만들어내라는 학교 측의 ‘배려’ 인 셈이다. 국문과인 나는 전공 점수가 아무리 개판이어도, 과에서 배운 내용으로 졸업 논문을 쓰지 않아도 졸업이 가능하지만, 토익 점수가 낮거나 영어 관련 필수 과목 4개(입학 시 점수가 낮으면 최대 6개)를 듣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다. 사학과도 철학과도 경영학과도 마찬가지다. 영어 최우선. 웃기긴 하지만 소리 내서 웃을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다.

잉글리시! 아니죠~ 이잉굴뤼쉬~맞습니다아~

왜 진분홍이 아니라 핫핑크냐
아파트부터 음료수까지, 영어는 중심부의 언어이고, 따라서 중심부의 권력이 가진 이미지를 그 안에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타자인 우리는 이 영어를 통해 중심부의 환상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세련되고 지적인 무엇. 하지만　영어는 어디까지나 제국주의의 후광을 덧입지 않고서는 그 효용성조차 불분명한 타자의 언어일 뿐이다. 문제는 이미 영어가 언어가 아니라 정치라는 점이다. 왜 진분홍이 아니라 핫핑크냐. 단순히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몰아가는 것도, 혹은 단지 뉘앙스의 문제라고 무시하는 것도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아니, 사실 문제의 해결책이 있기나 한가. 영어권 국가의 제국주의가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촌스러운 영어 발음을 수치스러워하면서, 젊은 시절을 영어 학습에 낭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야
…물론 공부하기 싫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몸매를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 관리도 못하는 무능한 인간. 이라는 부당한 수식어가 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손쉽게 무식하다 라는 부당한 수식어가 붙고, 영어 발음을 못하는 것은 너무나 쉽게 벙어리에 비유된다. 1)국어교육연구소는 서울대 교수 50여명의 강의를 조사해 전체 교수의 70%가량이 한 문장에서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외국어나 외래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따라서 수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무식해지지 않도록,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조기 영어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러한 지성의 상징으로서의 영어는 우리의 언어가 전문 용어에 정착하는 것에 거대한 방해 요인이 된다.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그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변명은 이미 구차하다. 자국어를 토대로 고유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함의 치명성은 영어의 화려한 장막에도 완전히 감춰지지 않는 결함이다.

제국주의의 망령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어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미국 제국주의 시대에 영어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어쨌거나 졸업하기 위해서 모의토익을 볼 것이다. 일정 점수를 얻을 때 까지. 졸업에 필수인 영어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 이번 방학에는 계절학기 까지 들어야 한다. (젠장) 독서실에 가면 모든 학생들이 예비 공무원에 영문과다. 펼쳐진 책은 태반이 영어다. 분한 것은 비영어권. 인정하기 싫어도 비주류인 우리가 이 거지같은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분투할 시간을, 영어권의 젊은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영어 공용화, 모국어 추진 운동일까? 국제어인 영어를 쓰지 못하면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니까? 공용어로 하면 그 중요한 영어를 훨씬 더 잘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영어도 우리를 사랑해 줄까? 우리의 수족이 되어 줄까?

…이상한 일이다. 식량 주권을 잃었을 때의 공포는 손쉽게 상상하면서, 언어 주권을 잃었을 때의 문화적 정신적 고갈은 왜 이다지도 쉽게 무시되는가. 영어는 신데렐라의 구두도, 왕관도 아니다. 대륙 너머에서 내민 칼. 잡으면 피가 나지만 놓치면 최소한의 기회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손에서 피가 나고, 잘릴 것만 같지만. 뭐, 손 하나 잘리는 것이 대수인가. 더 중요한 것을 잃느니 이깟 수족 따위.”

1) 강준만의 인간학 사전: 영어 제국주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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